1세기 전만 해도 사진은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단 카메라가 너무 무거워 휴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죠. 그런데 독일의 한 회사에서 소형 카메라를 선보이면서, 사진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했습니다. 독일의 카메라 브랜드 라이카(Leica)는 필름 카메라 시대를 열며 카메라의 새 역사를 썼는데요.
물론 지금 라이카의 카메라를 사용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당연히 내장된 기술들도 라이카의 제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죠. 가성비도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데요. 그렇다면 라이카는 왜 두터운 마니아층을 자랑하는 걸까요? 라이카의 ‘이유 있는 고집’을 포착해봤습니다.
라이카의 역사 = 사진의 역사
라이카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데요. 사실상 라이카의 역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라이카 이전에는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가 없었죠. 최초의 소형 카메라를 선보인 이후에도 감각적인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능으로 카메라의 기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시작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현미경 제조사 ‘옵티컬 인스티튜트’였습니다. 이 회사를 1869년 에른스트 라이츠(Ernst-Leitz)가 인수하면서 ‘에른스트 라이츠 광학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라이츠는 기술 개발에 집중해 현미경의 성능을 발전시켰습니다. 현미경 기술은 카메라 렌즈 기술의 토대가 됐죠.
- 라이카가 카메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엔지니어 오스카 바르낙(Oskar Barnack) 덕분입니다. 1914년 최초의 35mm 필름 카메라인 ‘우르-라이카(UR-Leica)’를 제작했는데요. 당시 카메라는 무거운데다 부피가 커서 자유로운 촬영이 어려웠습니다. 바르낙의 발명으로 손에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탄생했죠.
- 이후 라이카 I, II를 통해 갈아 끼울 수 있는 렌즈와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 RF) 카메라를 선보였죠. RF 카메라는 실제 사진이 촬영되는 렌즈와는 분리된 별도의 거리 측정 장치를 이용하는데요.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상이 보입니다. 초점을 잡기 위해서는 초점 링을 조절해 두 개의 상을 하나로 합쳐줘야 하죠. 다소 까다롭지만 ‘찰칵!’하는 셔터 소리와 블랙아웃이 생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길거리 사진에 제격이었는데요.
- 1954년에는 라이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카메라로 평가받는 라이카 M3가 출시됐습니다. 고도의 RF 기술과 한 손으로 가능한 렌즈 교환 등 M3에 적용된 기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요. 출시된 지 3년 만에 10만 대 이상 판매됐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1970년대 캐논과 니콘 등 일본 카메라 회사들이 잇달아 전자식 장치를 넣은 SLR(Single Lens Reflex) 카메라를 출시하면서 라이카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SLR 카메라는 한 개의 렌즈를 통해 상이 맺히는데요. 렌즈와 뷰파인더의 시차가 존재하는 RF 카메라와 달리 촬영하는 사람이 보는 장면 그대로 사진이 촬영된다는 장점을 내세웠죠. 1990년대부터는 아예 필름이 필요 없는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결국 라이카는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는데요. 2006년 부임한 안드레아스 카우프만 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카우프만 회장이 라이카를 일으킨 비결은 무엇일까요?
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 카우프만 회장은 라이카의 장점이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라이카 카메라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색감은 다른 카메라에서 찾아볼 수 없었죠. 하지만, 디지털카메라의 흐름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카우프만 회장이 내놓은 해결책은 아날로그 감성을 구현하는 디지털카메라였는데요. 마침내 2006년 M시리즈의 첫 디지털카메라인 라이카 M8이 탄생했죠.
② 원 프라이스(one price) 정책: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동일한 가격에 라이카를 구매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마케팅 전략에서 모티브를 얻었는데요. 에르메스는 전 세계 어디서든 럭셔리 이미지는 동일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가격을 통일했죠.
③ 유통망 정비: 전 세계에 라이카 매장을 구축하고 컨셉을 통일했습니다. 이전까지 라이카의 제품은 백화점과 대형 카메라 유통점에서도 판매됐는데요. 직영점에서만 판매하는 전략으로 유통망을 정비했죠. 나아가 단순히 제품을 진열해놓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즐길 수 있는 갤러리 형태로 매장을 꾸몄습니다.
④ 한정판 판매: 에르메스, 몽클레르 등 명품 브랜드와 협업해 한정판 제품을 출시해왔는데요. 마니아들의 수집욕을 자극합니다. 2012년 에르메스와 협업해 출시한 라이카 M9-P 에르메스 에디션은 300대만 생산됐는데요. 도난 사건까지 일어나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죠.
⑤ 라이츠파크: 우르-라이카 탄생 100주년이었던 2014년 라이츠파크 복합단지를 설립했습니다. 라이카 카메라의 본사·공장·갤러리·카페 등으로 구성된 단지인데요. 라이카 박물관과 워크숍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어 라이카 및 카메라 마니아들의 성지로 불립니다.
고집과 변화
대부분의 스마트폰에는 탑재된 자동 초점 기술, 라이카 카메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다루기 까다로운데요. 하지만 카메라계의 명품이라 불릴 만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오래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마니아층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죠.
고집
라이카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비슷한 전략을 내세우는데요. 원칙과 기본을 지키겠다는 신념 아래 장인 정신과 브랜드의 전통을 강조하죠. 제품의 외형을 쉽게 바꾸지 않을뿐더러, A/S 과정에서도 라이카만의 고집이 돋보입니다.
- 라이카의 카메라 한 대가 만들어지기까지 총 100여 가지의 공정을 거칩니다. 일부 디지털카메라를 제외하고 모든 카메라는 수작업으로 생산되는데요. 따라서 하루 생산량은 50대에 불과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100여 가지의 공정 중 검수 과정만 60가지가 넘어간다는 사실인데요. 라이카의 장인정신과 완벽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제품 로고와 외관도 크게 바꾸지 않는데요. 라이카의 상징인 ‘빨간 딱지’는 1913년부터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100년 넘게 마니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죠. M 시리즈의 외형도 초기의 형태와 크기를 이어가는데요. 60년 전의 렌즈도 지금 생산된 카메라에 장착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변함없는 디자인은 라이카만의 감성으로 소비자에게 어필합니다.
- 라이카는 A/S로도 유명합니다. 단종된 제품도 수리가 가능한데요. 초창기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까지 계속 생산하기 때문이죠. 다른 브랜드는 신제품 구매를 촉진하기 위해 오래된 제품의 A/S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요. 라이카는 부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수리한다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수리할 때도 제품을 처음 샀을 때의 멋과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에 집중하죠.
변화
라이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고집할 것은 고집하되, 유연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기존 카메라 제품으로 증명한 광학 기술과 정밀 기술을 활용해 브랜드의 외연을 넓히는 중인데요. 브랜드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고객층을 포섭하려는 시도입니다.
- 라이카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연구합니다. 2018년부터 파나소닉, 시그마와 ‘L마운트 동맹’을 맺어 함께 기술을 개발 중인데요. 서로의 카메라에 렌즈를 끼워서 쓸 수 있도록 기술을 표준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3D 프린터로 연결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죠.
- 자체 광학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는데요. 독일 안경 브랜드 마이키타(MYKITA)와 협업해 안경을 출시했습니다. 스마트폰 브랜드와도 꾸준히 파트너십을 맺어왔는데요. 올해는 2014년부터 이어왔던 화웨이와의 기술 제휴를 중단하고 샤오미와 손을 잡았습니다.
- 새로운 사업 영역도 개척했는데요. 럭셔리 시계인 라이카 L1, L2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라이카 고유의 정밀 기술을 통해 수작업으로 생산하죠. 라이츠파크에 방문하면 장인이 직접 시계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경 렌즈 사업에도 뛰어들었는데요. 아이웨어 브랜드 노바셀(Novacel)과 기술 파트너십을 맺어 ‘라이카 아이케어’ 라인을 런칭했습니다.
100년의 가치
라이카의 전략을 뒷받침하는 것은 100년 동안 축적해온 라이카의 자산입니다. 그 자산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제품들과 사진 예술을 선도해왔다는 자부심인데요. 100년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를 가져옵니다.
- 2014년 공개된 우르-라이카 100주년 기념 영상은 라이카가 사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데요. 로버트 카파,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유명 사진작가들의 작품 35장을 오마주했습니다. 작품성을 인정 받아 2015 칸 국제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죠.
- 라이카는 수시로 자체 매장 혹은 갤러리에서 작가들의 사진전을 개최합니다. 라이카 카메라로 촬영된 작품을 통해 라이카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이죠. 한국 판교 매장에서는 이명호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 단종된 제품을 재발매하기도 합니다. 다음 달 라이카 M6이 재발매되는데요. M6은 1984년부터 2002년까지 175,000대가량 생산된 기종입니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만큼, M6의 재발매는 기대를 모으고 있죠.
모두가 카메라가 내장된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라이카만은 아날로그 카메라를 고집합니다. 다양한 필터가 범람하는 흐름을 거슬러 흑백 사진만 촬영되는 모델을 내놓기도 했죠. 여전히 많은 이들이 라이카의 카메라에 열광하는 것은 브랜드가 고집하는 신념과 긴 역사의 가치 때문입니다. 파트너십과 신사업 역시 브랜드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해왔는데요. 앞으로도 라이카가 필요한 변화는 추구하되, 브랜드를 지켜온 고집은 꺾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