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하이브. 이제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죠. 그렇다면 하이브 산하 레이블 어도어(Ador)의 새 걸그룹 뉴진스는 어떠신가요? 지난 7월 세상에 등장한 뉴진스는 한 달 만에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음원과 음반 성적은 물론이고 더현대 서울에서 팝업 스토어를 진행하는 등 제대로 주가를 올리고 있죠. 실제로 뉴진스의 뮤직 비디오가 공개된 후 하이브의 주가도 뛰어올랐습니다.
아이돌이 일종의 IP가 된 지는 오래됐지만 그중에서도 뉴진스는 각별합니다. 완성도 높은 앨범과 프로모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모두 어우러져 하나의 문화이자 브랜드가 됐죠. 여기에는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공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늘은 뉴진스의 브랜딩 전략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민희진이 누군데?
명실상부 케이팝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민희진은 2002년 SM 엔터테인먼트의 디자이너로 입사해 2017년 이사까지 역임한 입지전적 인물인데요. 2019년 하이브의 CBO로 이적한 후 뉴진스를 제작했습니다.
- ‘민희진’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소녀시대가 ‘Gee’ 활동에서 입었던 색색의 스키니진과 엑소가 ‘으르렁’ 활동 당시 보여준 교복은 알 법합니다. 둘 다 민희진 대표가 제안한 콘셉트인데요. 그는 이외에도 숱한 SM 아티스트들의 앨범과 브랜딩을 기획부터 제작까지 총괄하며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 민 대표는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자신의 기획 철학을 정반합의 개념으로 설명했는데요. 기존의 트렌드가 정(正)이라면, 사람들이 정에 지루함을 느낄 때 새롭게 반(反)을 제시함으로써 합(合)을 찾아간다는 것이죠.
- 그의 대표작인 f(x)의 명반 ‘핑크 테이프’는 소녀시대의 반(反)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요. 친근하고 발랄한 이미지의 소녀시대와 달리 실험적,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입니다. 민 대표가 직접 디렉팅한 아트 필름은 공개되자마자 화제가 됐죠. 분홍색 비디오테이프 모양의 앨범은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일관성과 연속성을 갖춘 기획 또한 민 대표의 장기인데요. 뮤직 비디오와 무대를 아우르는 앨범의 아트워크, 앨범의 프로모션, 또 앨범과 다음 앨범이 연결돼 만들어지는 내러티브까지 전부 매만져서 하나의 아티스트 브랜드를 완성하는 것이죠.
회심의 역작, 뉴진스
뉴진스(New Jeans)는 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는 청바지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되겠다는 포부와 새로운 유전자(New Genes)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데요. 그룹의 형태를 먼저 구상한 후 2019년 10월부터 5만명 규모의 글로벌 오디션을 진행해 어울리는 멤버를 선발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뉴진스의 콘셉트
- 뉴진스는 ‘뭔가 다른 하이틴’으로 민희진 대표의 정반합을 이어갑니다. 뉴진스 멤버는 실제로도 전원 10대인데요. ‘어텐션’ 뮤직 비디오에서 멤버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고, 화장도 가볍게 한 채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편안한 화면 아래 자연스러운 매력은 극대화되고요. 이는 최근 케이팝을 주도하던 강렬하고 화려한 걸크러시 콘셉트와는 대비됩니다. Y2K 스타일의 하이틴은 이미 유행하고 있었지만, 강조점을 비틀어서 새로움을 만들어냈죠.
- 뉴진스에게는 요즘 아이돌이라면 하나씩 있는 ‘세계관’도 없는데요. 대신 이들이 내민 키워드는 친구입니다. 앨범에는 포토 카드와 함께 구매자가 뉴진스의 친구임을 증명하는 ID 카드가 들어 있죠. 로그북에는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알려줘!”라는 질문에, “아~ 너무 많은데.”로 시작되는 답변이 실려 있고요. 하이틴의 정수인 ‘풋풋한 우정’을 팬덤과의 관계로 확장해 콘셉트를 공고히 했습니다.
- 민 대표가 추구해 온 일관성은 뉴진스의 이번 앨범에도 여과 없이 드러나는데요. 대개 형식상 넣는 가사 페이지에도 곡과 어울리는 디자인을 가미했습니다. 두 번째로 공개된 ‘하입 보이’의 뮤직 비디오는 버전이 4개나 되지만 역시 하나의 이야기로 뭉쳐지고요. 앨범을 이루는 비주얼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거대한 연작처럼 느껴집니다.
음악을 넘어서
- 데뷔 프로모션도 범상치 않았습니다. 티저와 프로필부터 공개하는 관행과는 달리 처음부터 어텐션 뮤직 비디오 풀 버전을 공개했죠. 민희진 대표는 “한 번의 호기심을 우리 음악을 (실제로) 보고 듣는 기회로 끌어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요.
- “팬들이 뉴진스의 음악을 충분히 즐긴 후 앨범 구매를 결정할 수 있도록” 음원 발매 후 8일 뒤에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파격이 오히려 화제를 모으면서 ‘정’을 깨부순 것이 옳았음을 증명했죠.
- ‘힙’의 최전선, 더현대 서울에서 진행하는 팝업 스토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멤버들이 공간 곳곳에 남긴 메시지와 공중 전화를 닮은 청음용 스피커, 즉석 사진 부스가 돋보이는데요. 뉴진스 감성을 살린 굿즈들과 더불어 예약 판매 둘째 날 매진된 가방 모양 앨범도 확인할 수 있죠. 평일에도 200팀이 넘는 대기가 기본일 정도로 MZ세대 핫플로 자리잡았습니다.
- 팬들과 소통하기 위한 전용 앱 ‘포닝’도 있습니다. 멤버들의 채팅이나 라이브 방송을 즐기고, 사진과 일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날 휴대폰에서 따 온 어플 디자인은 앨범의 전반적인 비주얼을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멤버들과 연락하는 느낌까지 살렸는데요. 여러 아티스트가 함께 사용하는 ‘리슨’, ‘유니버스’ 등 기존 팬덤용 어플과 달리 뉴진스의 브랜드에 확실하게 편입돼 있죠.
뉴진스는 대중을 얼마나 설득했을까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뉴진스의 데뷔 앨범은 꼼꼼한 기획이 돋보입니다. 그렇다면 뉴진스의 면면은 대중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을까요? 다른 신예 걸그룹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경쟁자는 어떤데?
- SM이 레드벨벳 이후 6년만에 내놓은 걸그룹 에스파는 SM의 새로운 세계관, 속칭 ‘광야’를 세상에 알린 주역인데요. 극도로 컨셉츄얼한 설정과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번째 타이틀 ‘넥스트 레벨’은 뮤직비디오 공개 32일 만에 유튜브 1억뷰를 돌파하고 멜론 차트에서도 롱런하며 SM 특유의 기획력이 여전함을 보여줬죠.
- 스타쉽의 대형 신인 아이브는 화려한 비주얼과 중독성 넘치는 곡으로 데뷔부터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데뷔곡 ‘일레븐’으로 음악 방송 13관왕을 차지한 후 ‘러브 다이브’, 최근 발매한 ‘애프터 라이크’까지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과거 아이즈원 활동으로 인기를 얻은 멤버들을 잘 활용해 그룹의 입지까지 탄탄하게 다졌습니다.
- 르세라핌은 올해 5월 데뷔한 하이브의 또 다른 걸그룹입니다. 그룹의 콘셉트에 “I’m fearless”, 천사의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녹여냈죠. 데뷔 직전 한 멤버의 학교 폭력 가해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부침을 겪었으나 반응은 대단했는데요. 일주일만에 30만장의 앨범을 파는가 하면, 멜론 차트에서도 3주 연속 10위권을 지켰습니다.
그럼 뉴진스는?
- 우선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에서의 약진이 돋보이는데요. 지난 22일 공개된 8월 3주 멜론 주간 차트에서 어텐션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11일 일간 차트 정상에 올라선 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죠. 이는 지난 6년간의 아이돌 데뷔곡 중에서도 유일한 성과인데요. 글로벌 스포티파이의 8월 2주 차트에서도 137위를 기록하며 해외 반응도 증명했습니다.
- 음악 방송 성적도 만만치 않습니다. 뉴진스는 지난 4일 ‘엠카운트다운’으로 음악 방송에 처음 출연한 후 3주차부터 일주일 동안 엠카운트다운, ‘뮤직뱅크’, ‘쇼!음악중심’, ‘인기가요’의 1위를 싹쓸이했습니다.
- 음반 판매량도 초동만 31만장을 기록하며 역대 여자 아이돌 데뷔 앨범 초동 기록을 갈아 치웠습니다. 음반 정식 발매 이후 첫 일주일간의 판매량을 일컫는 초동은 팬덤 화력을 드러내는 수치인데요. 기존 팬덤이 없음에도 단기간의 집중적인 프로모션과 소장 가치 있는 앨범으로 폭발적인 주문을 이끌어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순위는 대중성을, 음악 방송 성적과 음반 판매량은 팬덤 규모를 암시하는 지표로 볼 수 있는데요. 뉴진스는 7월 22일 세상에 뚝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성과를 내면서 순식간에 대중과 케이팝 팬들을 모두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 ‘역시 민희진’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입니다. 이전에 f(x)나 샤이니와의 작업에서 보여줬던 담백하면서도 독특한 감성이 뉴진스에서도 빛을 발했다는 평입니다. 강렬한 비트 대신 오히려 힘을 뺀 음악으로 ‘합’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이죠.
- 한편으로는 뉴진스의 ‘새로운 하이틴’도 결국 어른들이 원하는 10대의 이미지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꾸밈없고 미숙한 모습도 사실은 인위적인 콘셉트이지만 이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주제 아래 모호해지죠.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아이돌 멤버들을 상품화하는 것은 케이팝 업계 전반의 문제인데요. 뉴진스의 기획도 이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한국에 아이돌 전성시대가 열린 것도 2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이제 아이돌은 멤버 개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룹의 효과적인 브랜딩까지 동반해야 성공할 수 있죠. 하나의 아이돌은 곧 내적 완결성을 갖춘 하나의 문화가 돼야 합니다. 뉴진스는 그 예시를 몸소 보여주고 있고요.
케이팝 업계에서 새롭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민희진은 이번에도 한 수를 보여줬는데요. 뉴진스는 정말 그룹명처럼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 앨범에서 뉴진스가 또 어떤 확장을 보여줄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