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약세, 흔들리는 안전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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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약세, 흔들리는 안전자산

“안전 자산” 엔화, 역사적 약세

안전 자산으로 여겨지던 엔화 가치가 연일 하락하고 있습니다. 3월 28일 엔-달러 환율* 123.87엔까지 하락했습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환율 방어선으로 여겨지던 ‘구로다 라인*’인 125엔이 무너진 것인데요. 이는 근 6년 중에 가장 낮은 환율입니다. 원-엔 환율 역시 같은 날 996.55원으로 3년 3개월 중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엔-달러 환율이란 1달러를 사기 위해 필요한 엔화로, 엔-달러 환율이 올라갈 수록 엔화의 가치는 낮아집니다.

**구로다 라인이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2015년 엔화 약세를 견제하던 당시의 환율인 124.63엔을 가리킵니다.

실질효율환율(Real Effective Exchange Rate) 역시 역사상 최저점에 도달했습니다. 실질효율환율이란 세계 60개국의 물가와 교역비중을 고려해 각국 통화의 실질적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데요. 수치가 클수록 해당 통화가 고평가 되었고, 낮을수록 저평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3월 17일 발표한 일본의 2월 실질효율환율은 66.54로, 해당 통계를 산출하기 시작한 1972년 2월 이후 가장 낮은 값입니다.

이는 곧 엔화의 대외적인 구매력이 낮아졌다는 의미로, 엔화의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요. 현 상황에서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과거부터 엔화는 금, 달러와 더불어 가치가 쉽게 하락하지 않는 대표적인 안전자산 중 하나로 인정받았기 때문인데요.

엔화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세계적인 위험상황이 발생할 때 그 가치가 오히려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국제 정세가 불안한 요즘, 오히려 엔화는 역사적인 저점에 도달해 있습니다.

엔화 가치 하락, 왜?

엔화 가치가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과 여타 선진국의 금융정책 괴리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긴축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시장이 풀린 자국의 통화를 회수하려는 하는 것인데요. 대표적인 긴축정책으로는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 등 선진국은 코로나19 이후 제로금리에 가깝게 낮췄던 기준금리를 다시 높여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하려 하고 있죠.

그러나 일본의 정책 방향은 다릅니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양적완화 정책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양적완화 정책이란, 저금리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최대한 많은 통화가 시장에 유통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시중에 돈을 푸는 정책인 것이죠. 일본은행은 금리를 동결시키고, 자국 채권 금리 상승 방어를 위해 국채를 매입하는 정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금리 인상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금리 인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금리 차이가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엔화를 팔고 달러를 매수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또한 '캐리 트레이드' 현상도 가속화되었는데요. 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국가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금리가 높은 국가의 금융 상품에 투자함으로써 수익을 내는 투자 기법입니다. 결국 국가와 민간 모두 시중에 더 많은 엔화를 공급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정책으로 에너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것 또한 엔화 가치 하락을 부추겼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 제조업체들의 오프쇼어링*이 활발해졌는데요. 여기에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며 일본은 화력발전 의존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결국 오프쇼어링으로 인해 일본의 수출 규모가 줄고, 화력발전 비중이 확대되며 에너지 원자재 수입 규모는 늘어난 것입니다. 이 영향으로 일본의 경상 수지는 에너지 가격에 큰 영향을 받는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오프쇼어링(Off-Shoring): 기업이 제조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건비와 생산비가 저렴한 국가로 생산기지를 이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작년 말부터 에너지 원자재 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 왔습니다. 결국 일본의 지난 1월 경상수지*는 1조엔이 넘는 규모로 적자를 기록했는데요.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적자 입니다. 경상수지가 1조엔 적자라는 것은 곧 국가가 벌어들인 외화보다 소비한 외화 규모가 1조엔 가까이 많다는 의미인데요. 즉, 일본 내에 달러가 부족해지면서, 달러의 가치는 높아지고 엔화의 가치는 낮아진 것입니다.

*경상수지: 국가가 재화와 서비스를 외국과 거래한 결과로 나타나는 수입과 지출의 차액으로, 쉽게 말해 무역에서 얼마나 흑자를 봤는지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엔화 가치 하락세의 전망과 영향

엔화 약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블룸버그는 엔-달러 환율이 1990년 이후 최고치인 150엔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요. 일본과 주요 선진국 간 금리 차이가 앞으로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아직 금리 인상 언급이 없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내년까지 10차례 이상 금리를 올릴 수 있다고 발표했죠. 금리 차가 커지면 금리가 낮은 일본의 엔화를 팔고, 금리가 높은 미국의 달러화를 사는 사람들이 늘기에 엔화 가치는 더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엔화 가치 하락은 우리나라에게 악재로 작용할 위험이 높습니다. 자국 통화가 약세일수록 수입에는 불리하지만, 수출에는 유리하기 때문인데요. 만약 올해 하반기까지 엔화 약세가 장기화되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일본 기업들에 비해 낮아지게 됩니다. 특히 자동차, 조선, 전자산업 등 일본 기업과 직접 경쟁하는 산업들은 대응책 마련을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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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IN

오늘 내용은 조금 복잡한데요. 핵심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미국은 앞으로 금리를 더 올릴 예정이고, 일본은 금리를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2) 그러면 사람들은 금리가 낮은 일본 은행에 돈을 맡기기 보다, 금리가 높은 미국 은행에 돈을 맡기려 할 것입니다. 엔화를 팔고, 그 돈으로 달러를 사서 미국 은행에 돈을 맡기면 더 많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거죠.

3) 결국 자연스럽게 시장에 풀린 엔화의 양은 많아지고, 달러화의 양은 적어집니다. 즉 엔화 가치는 하락하고, 엔-달러 환율은 상승하게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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